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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만의 대청소 덕분에 클린해진 서랍장/빨랫줄 대신 쓰는 런닝머신

개미라는 그 작고 조용한 것에 대하여 (1)

개미라는 그 작고 조용한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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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부터 우리 동네의 행정복지센터에 시험 운용을 위한 로봇 한 대가 들어왔다. 여기서 이 로봇이라는 것은 단순히 기계장치로서 작동하는 도구의 의미를 뜻하는 게 아니다. 민원 창구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퇴직률이 높아지고 그에 따른 관리비용이 만만찮게 들자, 직원을 사람이 아닌 로봇으로 대체하겠다는 특단의 조치에서 나온 행정적인 결론이었다. 처음에는 여러 반발이 있었다. 부자들이  '단순 업무'라 불리는 것들을 기계로 대체하길 희망할지언정, 소시민들은 그렇게 당장 내 눈 앞에 보이는 일상 속의 인물들이 로봇으로 갈아치워지는 것이 소름끼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본능적으로 그 로봇을 싫어했다.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인간과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이해하지만, 그것이 로봇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어떤 불결한 것을 마주하는 듯한 괴리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 로봇은, 평범한 검은 머리와, 유순하게 생겼으나 늘 어딘가 조금 울적해 보이는 둥근 얼굴, 보통의 체형과 그런 것들을 하고도 창구 앞에서는 '저는 로봇 직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는 조금은 특별한 팻말을 세우고 있어야 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라도 인간 직원한테서 서비스를 받기를 원했다. 좋은 고객이건, 나쁜 고객이건 간에.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민원 창구의 직원들을 로봇으로 대체하면, 불량 민원인으로부터 오는 정신적인 피해를 최대 86%까지 줄일 수 있을 거란다.

"방동행정복지센터의 김성아 주무관입니다."

내가 그를 처음 보게 된 것은, 그가 이 동네에 발령이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이 가슴께까지 오는 긴 머리의 얼핏 평범해 보이는 청년은 옷차림도 눈에 띄지 않는 회색 니트나 단조로운 청바지 같은 것을 입곤 했다. 그는 스스로를 김성아라는 이름으로 칭했으나 말하는 투에서는 그것을 자기 이름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내가 일하는 작은 인쇄소에 와서는 몇 가지의 인쇄물을 맡기고 갔다. 우리는 늘 고객 이름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물었고, 그는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로도 몇 차례 와서 인쇄물을 맡겼다. 대개는 센터 근처에 달아놓을 현수막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또 몇 달 뒤에야 그가 로봇이라는 걸, 그리고 그렇게 점점 로봇으로 대체되는 자리들이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마침 이사나 여러 잡다한 일들이 겹쳐 센터를 들락날락 할 일이 많았던 나는, 일부러 늘 텅 비어있는 김성아 주무관의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복잡한 서류를 그 기계적인 시선으로 훑어내려가는 동안 아무렇지 않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곤 했었다. 이를테면, "당신은 이렇게 사람들이 당신이 로봇이라는 이유로 찾아가지 않는 것에 속상하지 않느냐", "로봇으로서 이 사회에서 사는 건 어떠냐", "당신도 감정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같은 질문들이었다. 물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있는 로봇에게 그런 질문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하루종일 프린터 돌아가는 것만 보고 있는 나에게는, 그런 말하고 행동하고 선택하는 기계란 아주 신기한 경이 같았다.

주무관은 내 말에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차분하게 대답하고는 했다. 차별은 속상함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방증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사회가 로봇을 얼마나 평등하게 보느냐에 따라 그의 사고도 달리할 것이라는 것. 로봇으로서 살아가는 사회는 수많은 정보의 습득과 선별, 그리고 우선순위와 가치에 입각한 분석과 판단의 무한한 반복이라는 것. 구체적으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시간과 공을 들이면 충분히 어떤 감정에 대해서 알아나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마치 아이가 당신 같은 어른들을 보면서 사회적으로 약속된 정형화된 희노애락을 배우는 것과 상통하리란 것 - 이런 식의, 가끔은 다소 기이하기까지 한 대답을 그는 일말의 멈칫거림도 없이 순식간에 풀어놓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 그는 서비스직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꽤 상냥하게 사람들을 맞이했다. 나는 때때로 거리 밖에서 그를 만나면 인사하곤 했는데, 그는 비록 로봇일지라도, 늘 언제나 미소와 함께 내 인사를 기분 좋게 되돌려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가를 따라 걷던 나는 조금 특별한 풍경을 보았다.

햇볕이 따스하게 진눈깨비를 녹여가는 2월 중의 오후였다. 나는 오후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자전거 타고 다니는 노인들 하며,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이들 등 온갖 사람들이 내 앞뒤로 스쳐 지나가는 동안, 나는 불현듯 무언가에 이끌리듯 강 건너편의 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주무관이 여전히 그 칙칙한 잿빛 코트를 몸에 두른 채로, 손에 네모난 플라스틱 통 같은 것을 들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여 인사했다. 그는 멈춰서서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곧이어 나는 손짓으로 내가 빙 돌아서 그리 가겠다고 알렸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급한 걸음으로 그의 앞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는 그 자리에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손에 든 플라스틱 상자는 가까이서 보니 모래가 듬뿍 담긴 개미장 같았다. 그러나 거기엔 개미 한 마리의 움직임도 없이, 단지 작은 헝겊만이 들어 있었다.

단지 하나의 물건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또 다시 여러 갈래의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그 기계적인 사고가 어떻게 하여 오늘날 그로 하여금 이 텅 빈 개미장, 개미 하나 없이 단지 조그만 헝겊 조각 같은 것만이 남아있는 이 개미장을 들고 있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의 설계자는 이런 것을 고려해서 그를 만들지는 않았을 터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는 그것이 개미장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했고, 오늘 날씨가 좋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화제를 돌리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는 나와의 마주침을 일상스러운 것으로 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잡담을 하려 하는 듯했다. 나는 어김없이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 개미장을 가지고 무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요?" 언제나처럼 그는 어떤 물음에도 숨길 것이 없다는 투로 답했다. "내가 한 실험의 끝을 내기 위해서 왔어요."

그가 이 동네에 발령이 난 지가 어언 3년이다. '시범 운영'이라는 명목 하에 창구에서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접하게 된 지도 그만큼 되었다. 로봇으로서의 삶 또한 3년을 보낸 셈이었다. 그리고 그 3년 동안, 그는 딱 민원을 담당하는 로봇으로서 설계된 만큼의 것만 보여주면 되었다. 그가 구태여 실험을 해서 무언가를 발견할 이유는 하등 없다. 나는 그 실험이라는 것이 어떤 욕심에서 비롯된 건지 알고 싶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삶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어요. 내가 다루는 증명서들 너머의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창구에 와서 왜 웃고 우는지부터 시작해서, 이 서류들로 정의되는 삶에 대한 어떠한 정리된, 실증적인 답을 얻고 싶었어요."

"개미를 통해서요."

"그들의 삶은 길지 않으니 좋은 실험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나는 내 '시범 운영'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될지 알 수 없거든요."

그리고 그는 자기가 들고 있는 개미장을 약간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 이게 그 실험의 결과물이에요."

모래 위에 지폐 반만한 헝겊 조각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지난 주에는 내내 독감에 걸려서 거의 칩거 생활을 했네요. 사람이 아프면 우울해지고 까라지는 것이 정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스스로 위안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빨리 나아서 기분이 좋아지면 좋겠군요.

그래서 며칠 전에는 문득 눈에 들어온 가보지 않은 길을 기분 전환 겸 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하나 쓰고 싶어지더라고요. 로봇 사회복지사가 개미를 통해 이해한 삶에 대한 관찰기입니다. 무슨 교훈을 주려고 쓴 것은 아니고요. 완성된 작품을 올리지 않는 이유는...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올리기로 스스로와 약속했는데, 아직 다 쓰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ㅎㅎㅎ